*슬로워크와 합병 예정인 UFOfactory의 블로그에 게재된 "리빙랩이 뭔고 하니..."를 편집하여 발행합니다.


혹시 이 글을 보시는 분들 중 리빙랩에 대해 들어보신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리빙랩은 나름 ‘핫’한 트렌드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여전히 변방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핫’한 트렌드라는 건, 시민단체부터 과학기술 관련 연구기관과 연구자들, 시민참여를 행정의 중심에 두고 있는 지자체들 그리고 청와대에 보고되는 창조경제 관련 보고서에까지도 리빙랩이 화두로 제시되고 있다는 측면에서 ‘핫’하다는 것이고, 변방의 이야기라는 건 그 범위를 조금만 벗어나면 ‘리빙랩’이라는 단어가 여전히 낯설다는 의미다.



리빙랩, 내가 사는 공간이 곧 실험실

사실 나도 리빙랩이라는 단어를 접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무슨 얘기일까 궁금해서 세미나도 참석해보고 자료를 좀 찾아보니 리빙랩에 대해 이렇게 정의한다.


리빙랩은 실제 생활 현장(real-life setting)에서 사용자와 생산자가 공동으로 혁신을 만들어가는 실험실이자 테스트 베드 (리빙랩의 운영 체계와 사례 — 과학기술정책연구원)


표현은 조금 어려운데, 쉽게 이야기하면 내가 사는 공간이 바로 실험실이라는 말이다. 아.. 여기서 혹자는 실험실을 생체실험실이나 혹은 SF에서 기계가 인간을 사육하고 실험대상으로 삼는 것과 같은 그런 실험실을 상상할지도 모르겠다. 다행히도 그런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리빙랩은 아주 현실적이고 긍정적인 개념이다. 즉 ‘실험을 위해 통제된 공간에서의 기술개발이 아니라 실제 생활공간(real-life setting)에서 활동이 이루어지면서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 개발이 진행’ 되는 것을 의미한다. 기존의 실험과 테스트가 실생활과 유리된 현장에서 진행되었다면, 리빙랩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 현장에서 새로운 정책, 제도, 기술, 제품을 만들고 개선을 이루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리빙랩은 2004년 MIT의 W. Mitchell이란 교수가 생활공간인 특정 아파트를 정해 IT기술과 센서 기술을 설치하고 사용자를 관찰하는 ‘Placelab’을 구현한 것에서부터 유래되었다고 한다. (the placelab: a live-in laboratory for pervasive … — MIT Media Lab) W. Mitchell 교수는 리빙랩(살아있는 실험실, 생활 실험실)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그것의 구체적인 실행 방안 중 하나로 특정 장소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관찰하는 Placelab을 구현한 것이다. 그런데 Placelab은 사람들을 관찰의 대상으로 본다는 측면에서 다소 수동적인 접근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MIT의 Placelab(사진 출처)


유럽은 W. Mitchell 교수의 리빙랩 개념을 수용하면서 이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사용자들이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직접 참여하여 아이디어를 내고 그것을 실행하는 주체가 되는 적극적인 리빙랩 개념을 발전시켰다. 유럽에서는 핀란드・스웨덴 등에서 초기 리빙랩이 형성되었고, Helsinki Manifesto(2006)를 계기로 유럽 전반에 확산되었다고 한다.



전동휠체어의 시초, 리빙랩에서 나왔다: 리빙랩의 초기 사례

리빙랩의 초기 사례로 자주 언급되는 핀란드의 Lutakko 지역은 스키장과 레저단지, Himos 지역은 컨퍼런스 센터가 유명한 지역이다. Lutakko Living Lab은 지역의 개선 과제를 발굴하고 실행하는데 있어 대학, 기업, 거주자, 관광객, 공공조직 등이 모두 참여해 실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무엇을 개선해야 하는지를 공동으로 연구했다. 이 과정에서 지역의 현안, 개선 과제, 발전방향 등에 대해 지역민들이 직접 참여해서 아이디어도 내고 조사도 하고 직접 콘텐츠를 생산해내기도 했다.


프로토타입을 테스트하는 소년들, 휠체어의 조이스틱을 통해 게임을 하고 있다. (사진 출처)


또 다른 사례로 덴마크의 Egmont Living Lab에서는 장애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리빙랩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휠체어 공장을 견학하는 도중 한 학생이 조이스틱으로 움직이는 휠체어를 제안했다. 그 회사는 이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프로토타입(시제품)으로 개발했고 장애학생들은 개발된 시제품을 직접 테스트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제품이 우리가 길에서 볼 수 있는 조이스틱으로 움직이는 전동휠체어다.


한국에서의 리빙랩은?

한국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대전의 리빙랩 프로젝트 ‘건너유’는 지역의 소규모 IT업체와 지역민, 그리고 관이 함께 하여 만들어낸 생활 공간 개선 사례다. 대전의 ‘갑천’이란 곳은 비만 오면 하천이 범람해서 일년에 한두번씩은 돌다리를 건너는 사람이 빠지는 사고가 발생하곤 했다. 이에 지역의 IT기술 보유업체가 드론과 카메라 그리고 태양열을 이용해 하천의 상태를 상시 촬영할 수 있는 장치를 하천변에 설치하고 주민들이 스마트폰 앱으로 하천의 상태를 언제든지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이제 주민들은 길을 나서기 전 하천의 상태를 확인하고 위험하다 싶으면 기다렸다가 나가거나 아니면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관은 이 프로젝트의 비용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즉 지역의 IT업체 그리고 관이 협력하여 지역의 문제를,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해결한 것이다.


건너유 프로젝트 동영상


이러한 방식으로 리빙랩이라는 개념 안에서 실험실과 생활공간이 뒤섞인다. 이러한 리빙랩 개념은 지자체나 정부가 한 지역을 대상으로 새로운 사회정책이나 새로운 기술을 도입할 때뿐만 아니라 (전동휠체어의 사례처럼) 기업이 새로운 제품을 개발할 때에도 폭넓게 적용되고 있다.



리빙랩, 우리나라에서 가능하려면?

통상 우리나라에서 지역 개발 프로젝트라고 하면, 정부나 지자체가 개발 범위를 정의한 후 대학(학계)이나 기업에 개발 청사진(마스터플랜)을 맡기고, 청사진이 나오면 지역민들의 의견은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일반적인 사례다. 그 과정에서 쫒겨나는 지역 토착민들과 정책을 집행하려는 공권력이 극단적으로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우리나라의 국책 개발사업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그런데 리빙랩에서는 사업의 청사진을 만드는 작업부터 지역민들이 정부나 지자체, 대학이나 기업과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한다. 만약 이런 방식이 실제로 작동한다면 용산참사와 같은 황당하고 비극적인 사건의 재발은 염려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물론 이런 것이 가능하려면 무엇보다 관이 주도권과 권력을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한다. 관이 문을 열지 않으면 시민들이 참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한국에서도 리빙랩이 화두가 되고 있다는 것은, 한국 사회가 그만큼 변화했다는 증거로 보아도 될 것 같다. 시민운동과 사회운동 경력을 가진 민선 지자체장들이 하나둘씩 들어서면서 권위적이던 행정체제를 바꾸려고 노력하고 시민들의 참여를 제도화하려는 노력들을 (혹자는 부족하다고 하겠지만) 꾸준히 진행해왔다. ‘리빙랩’이라는 단어는 이러한 방향성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개념으로 자리잡는 듯 하다.


다른 무엇보다 리빙랩이 신선했던 점은, 국가 혹은 행정조직의 성격이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기존의 사회운동, 시민운동에서 국가, 관, 행정조직은 투쟁의 대상, 싸움의 대상, 비판의 대상, 감시의 대상이었다. 특히 군사정권 시절의 억압적인 문화가 수십년간 지속된 한국에서 사회운동과 정부조직, 행정조직 사이의 괴리감은 상당했었다. 그런데 리빙랩에서는 이 간극이 옅어지거나 사라진다. 시민운동 경험을 가진 행정가들이 등장하고 협치(governance)란 개념이 등장하고, 정책운영자들 사이에 ‘리빙랩’이라는 개념이 정책적 지향점으로 공감대를 확장해가면서 적극적으로 이 간극을 해체하려는 노력들이 시도되고 있다. 즉 관이 이제는 비판과 감시의 대상만이 아니라, 협업과 참여의 대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정도나 깊이, 진정성에 있어서 부족할 수 있고 시류에 편승하는 전시행정 같은 측면도 있을 수 있겠지만, 큰 방향은 이렇게 잡히는 듯 하다.


리빙랩이 명시적으로 시작된 지 10여 년이 지났고, 한국은 대략 10년이 못 되는 시간의 터울을 두고 이 흐름을 좇아가는 중이다. 세계사의 흐름에서 산업화는 100년 늦었고 민주화는 한 50년 늦었고, 정보화는 따라잡는 듯 하다가 뒤쳐졌는데, 리빙랩의 개념은 10년 안되는 시차를 두고 따라가고 있으니, 얼추 한국도 이제 세계사적인 흐름을 따라잡고 있는 것 같다.



리빙랩에서 IT 기술의 역할

마지막으로 리빙랩에서 IT 기술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IT 서비스를 구축할 때 미리 한정된 사용자들을 대상으로 실제 상황처럼 테스트해보거나 혹은 오픈 베타 개념으로 서비스를 오픈해놓고 실 사용자들의 반응을 보며 수정/개선하는 프로세스를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리빙랩은 바로 이 과정을 벤치마킹한 개념이다.


또한 사람들의 참여 문턱을 확 낮추어놓았다는 것도 IT 기술의 중요한 역할이다. IT 기술을 활용하면 순식간에 정보를 공유받을 수 있고 또한 원거리에서도 본인의 의사를 바로 전달할 수 있기 때문에 참여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다. 또한 최근 등장한 IOT(사물인터넷) 기술 등은 생활 현장에서 기존에는 쉽게 얻을 수 없었던 정보들을 쉽게 얻을 수 있도록 함으로써, 생활 공간 자체를 사람들이 직접 모니터링할 수 있도록 해준다. 예를 들어 건너유 프로젝트는 그 동안은 집에서 볼 수 없었던 하천의 현재 상태를 실시간으로 보여줌으로써 지역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이처럼 IT기술을 잘만 활용하면 이전에는 풀기 어렵거나 혹은 풀 수 없었던 여러가지 문제들을 풀어낼 수 있다.


또 다른 예로 북촌 리빙랩 프로젝트는 서울의 북촌이란 마을에 새로운 IT 인프라를 구축하여, 지역민과 관광객들의 편의성을 도모하고 도시 문제를 해결하려는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 안에는 실생활에 대한 개선 방안을 찾는 것과 더불어 비콘과 간편결제, 무선인터넷 등 새로운 기술들을 직접 생활현장에서 실험하는 계획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서울시만이 아니다. 각 지자체들은 내부적으로 ‘리빙랩’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한국 사회는 IT 기술의 덕을 제법 많이 보았다. 2000년대 초반, 정부가 IT기술에 파격적으로 투자한 것이 2000년대 중반 경제활성화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고, 또한 IT 기술은 촛불집회와 같이 시민들의 대규모 직접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커뮤니케이션 인프라로 작동하기도 했다. 한국 사람들은 사회에 잠재된 폭발적 에너지를 끄집어내는 쪽으로 IT 기술을 활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유럽인들은 우리만큼 역동적이지는 않더라도, 생활 현장 곳곳에서 기술을 활용해 생활 현장 자체를 변화시키고 개선하는 방식으로 IT 기술을 활용하는 방안을 찾아낸 것 같다. 이런 측면에서 리빙랩은 세계 최첨단의 IT기술과 인프라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가 만들어내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과 방법론을 제공해준다.


2008년 6월 10일, 서울시청 앞 (출처: 나무위키)/ 2016년 1월 창원의 ‘시민리빙랩’ (출처: 창원시정연구원)


리빙랩 열풍을 계기로 생활 현장 구석구석에 IT 기술이 융합되어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사회기술문화가 한국 사회에서 제대로 자리잡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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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low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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