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일하는 디자이너일까?
저는 “기획자 겸 디자이너”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직함을 쓰는 이유는 일반 디자이너와 조금은 다른 경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학에서는 실내건축디자인을 전공했고, 스타트업에서 브랜드 디자인, 서비스 기획, 마케팅 등의 종합적인 일을 맡다가 슬로워크에 입사했습니다. 나는 무엇을 잘하는 디자이너일까? ‘전문적인’ 디자인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더 이런 고민이 들었습니다.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디자이너는 어떻게 일할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필요했습니다. 모든 디자인 프로세스를 유형화할 수는 없을 테지만 ‘프로세스를 디자인하라(낸시 스콜로스, 토마스 웨델 지음)’라는 책을 참고하여 정리해 보았습니다.
디자이너는 어떻게 일할까?
1. 리서치
리서치에 관해 책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리서치는 프로젝트의 주어진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디자이너는 주어진 과제의 비주얼적인 측면만 집중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만 생각하기 쉽지만, 프로젝트의 궁극적인 효과에 영향을 미치는 외부요인과 그것이 운영되는 시스템을 파악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다음은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더블리 디자인 오피스의 브랜드 모델에 대한 콘셉트 맵에 관한 설명입니다. 이 맵은 브랜딩의 복잡성과 상호관계, 그리고 브랜드와 경험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체계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로축은 브랜드 ‘관리자', ‘가능성', ‘제품’, ‘ 사용자 경험'으로 이어집니다. 관리자는 가능성을 상상하고, 가능성은 제품으로 이어지며, 제품은 사용자에게 경험을 제공하고, 경험을 통해 인식이 형성되고, 인식이 모여 브랜드를 구축하기 때문입니다.
세로축은 ‘브랜드' 내부의 의미와 브랜드에 영향을 끼치는 외부 시스템을 연결합니다. 그리고 두 축은 ‘경험’과 ‘인식'이 만나는 곳에서 교차합니다. 이처럼 리서치는 문제에 대한 통찰력을 손쉽게 얻게 해주어 포괄적인 이해를 돕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협업자 간의 아이디어 공유도 가능하게 합니다.
2. 영감
영감에 관해 책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과학적 방법: 존재하는 것의 본질을 찾는데 사용되는 문제 해결 행동의 패턴
디자인적 방법: 아직 존재하지 않는 가치를 발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패턴
과학이 분석적이라면 디자인은 건설적입니다. 디자이너의 영감은 평생의 관심사에 대한 고민에서 나오거나, 일상생활 중 일어나는 작은 사건들을 통해 떠오르는데, 호기심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호기심은 질문을 만들고, 질문하는 디자이너는 창조적 경험을 할 수 있는 개방성이 발달합니다.
다음은 우연히 발견된 오브제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된 작업에 대한 설명입니다. 네덜란드 디자이너 멜러 하머르는 <도시 속 타이포그래피 중매(Typographic Matchmaking in the City)>에서 레바논의 타입 디자이너 야라 코우리와 함께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그들은 함께 하루를 보내면서 아랍어 쓰기에 푹 빠져 연구하다가, 모든 문자가 접시 위에 있는 탈리아탈레(파스타의 한 종류)처럼 보인다고 농담을 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농담을 증명하기 위에 슈퍼마켓에서 건조 탈리아탈레를 사서 부순 뒤에 탁자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그 조각들에서 거의 모든 알파벳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3. 드로잉
드로잉에 관해 이해하기 위해 책에서 소개한 미국의 그래픽 디자이너 에드 펠라의 작업방식을 살펴보려 합니다. 그의 작품은 매우 직관적이지만, 그는 ‘직관’의 전제부터 의문을 갖습니다. 그는 창조성과 창의적 프로세스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고, 각각의 디자인적인 문제들은 그 나름의 해결 방식이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개념화 이전에 실행, 인식 이전에 의미’라는 슬로건을 바탕으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무엇인가를 하는’ 방식으로 드로잉에 접근합니다. ‘의식의 흐름’ 기법이 떠오르는데요. 문제를 정의하고 아이디어를 떠올린 뒤 디자인을 개발하는 보통의 프로세스와는 달리 그는 손이 가는 대로 스케치를 시작하면서 이미지를 떠올리고 그다음 과정으로 작업에 대한 의미를 떠올립니다. 다음의 그림은 에드 펠라가 네 개의 심이 있는 플라스틱 볼펜으로 그린 최근의 스케치북입니다. 이 스케치북의 마지막 드로잉은 4색 펜의 모든 잉크를 결합하는 방식으로 발전합니다.
4. 내러티브
내러티브에 관해 책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디자인도 의사소통의 도구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디자인을 내러티브 관점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디자인도 하나의 이야기처럼 ‘처음·중간·끝'의 기승전결 구조로 읽힌다면 독자와 관람객은 역사·문화·개인적 사건의 맥락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정적이었던 이미지는 동적인 이미지로 변화하기도 하며, 심지어 별개의 순간들이 강력한 하나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다음은 책에서 소개된 미국의 그래픽 디자이너 로레인와일드의 작업방식입니다. 그녀는 작업하면서 핵심이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자세히 관찰하고 귀를 기울여 듣는 연습을 꾸준히 합니다. 신중하게 특성을 분석한 뒤, 어떻게 책이 그 의미를 담고 기록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집니다. 존 발데사리의 전시 카탈로그 작업을 할 때 이러한 그녀의 특성이 명확히 드러나는데요. 이 책은 디자이너나 클라이언트의 것만이 아닌 여러 사람이 그의 작품과 작품을 바라보는 관점에 관해 보여주려 노력합니다.
1 마치 갤러리 벽을 걸으며 그림을 감상하는 것처럼 흐름을 고려해 이미지를 배치했습니다.
2 발데사리의 영화 작업에 대한 에세이에서 완벽하게 영화 스틸컷으로 이어지며 끝나도록 판본에 있는 이미지를 꼼꼼하게 배열했습니다.
5. 추상
추상에 관해 책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추상적 상징은 비주얼커뮤니케이션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디자이너는 복잡한 아이디어를 표현하는 상징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제한된 범위 안에서 간결한 상징을 만드는 작업은 굉장한 집중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책에서 한국의 사례를 소개하고 있는데요. 친숙하게 알고 있는 안상수 디자이너의 이야기입니다. 안상수는 생명 평화를 가꾸고 실천하는 사람들의 연대인 ‘생명평화결사' 단체의 로고 디자인을 의뢰받습니다. 이 작업은 21세기의 ‘평화'를 정의하고 표현하기 위한 고차원의 개념적 사고를 요구했습니다.
그는 이 과정에 대해 ‘몇 개월간의 사색이 낳은 집중과 스케치의 시간'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에게 영향을 준 주요 이미지는 모든 생물 사이의 상호연관을 상징하는 고대 인도의 상징 ‘인드라의 그물'이었습니다. 또한, 소통을 위한 메시지가 복잡했기 때문에, 여러 표현의 계층구조를 설명할 방법을 브레인스토밍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표의 문자인 한자 체계를 사용해 치밀하게 의미를 담아내려 노력했습니다.
6. 개발
개발이라는 단어가 자칫 개발자의 일을 뜻하는 것으로 오해를 부를 수 있겠지만 책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디자인 콘셉트가 세워지면 개발 단계는 신속하게 프로토타입을 제작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 단계에서 디자이너의 생각이 분명하더라도 아이디어가 실현된 모습은 매우 허술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작업을 진행하면서 새로운 선택을 수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동성과 개방성을 가지고, A, B, C 단계를 완료했더라도 새로운 아이디어 F가 나타나는 경우, F에 대해 더 진행합니다.
책에서는 프랑스의 디자이너인 필리프 아페로가 포스터를 제작하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노벨상을 받은 나이지리아 작가 윌레 소잉카를 기념하는 포스터를 만들 때, 직조된 사물의 콘셉트를 떠올렸습니다. 예술과 공예에 강한 문화적 기반을 가지고 있는 요루바족에 뿌리를 두고 있는 작가의 생애에서 떠올린 것입니다.
아페로는 생각한 것을 실현하기 위해 포스터를 길게 줄 모양으로 잘라 직조하듯이 엮어냈습니다. 좁은 줄에서 넓은 줄로 변형하거나, 수직 평면 또는 각이 있는 평면, 색상, 크기, 리듬감 등에 변화를 준 실험을 거듭하며 종이 목업을 계속해서 만들어 나가며 최종 포스터를 완성했습니다.
7. 협업
협업에 관해 책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디자인은 거의 모든 순간이 협업의 과정입니다. 디자이너는 파트너, 클라이언트, 큐레이터 그리고 제작자와 긴밀하게 소통하며 작업해야 합니다. 협업을 통해서 어떻게 디자이너는 창조적인 잠재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지에 대한 예시를 살펴보겠습니다.
책에서는 이탈리아 디자이너 레오나르도 소놀리의 작업을 통해 협업의 과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코라이니 출판사 홍보물 제작 의뢰를 받았을 때, 임의로 일어나는 인쇄 효과를 콘셉트로 정했습니다. 코라이니 출판사가 창의적이며 예술적인 회사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원래는 슈퍼마켓 포스터에나 사용되는 저렴하고 조악한 인쇄방식인 스플릿 파운틴 인쇄(무지개 인쇄)를 사용해 색의 변화를 꾀했습니다. 두 색의 잉크를 각각 인쇄기 잉크 통 반대쪽 끝에 붓고, 잉크는 종이를 가로질러 그라데이션 색상을 만들며 천천히 혼합됩니다. 하지만 소놀리는 이내 최종 색상조합에 대해 예상하지 못한다는 단점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인쇄소와의 협력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다행히 한 인쇄공이 스플릿 파운틴 인쇄를 위해 만들었던 임시 목조 장치를 이용해 색을 확인하면서 의도했던 색상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같은 듯 다른 듯, 우리는 어떤 디자이너일까?
제가 속해있는 2DO팀은 3명의 디자이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 팀 사람들과 앞서 다룬 7가지 중 각자 어떤 부분에 무게를 두는지를 얘기해보았습니다. A는 영감과 추상에, B는 드로잉, 내러티브, 협업에, 저는 리서치, 내러티브, 개발을 위주로 일에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평소 셋이 함께 팀프로젝트를 할 때면 서로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이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A는 순간 떠오른 영감에서 아이디어로 발전시켜 나갔고, B는 먼저 손을 움직여 계속 스케치를 해나갔습니다. 저는 이야기나 맥락에 중요도를 많이 두는 편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디자이너들이 협업하면서 서로의 부족함을 메꿔가며 시너지를 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디자이너들이 일하는 프로세스를 정리하면서, 저 자신의 장점을 잘 알게 되고, 또한 파트너의 장점을 발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직함 앞에 ‘기획자‘라는 말을 붙여 다른 디자이너와는 구별되는 정체성을 드러내고 싶었던 제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일하는 디자이너들이 모두 같은 ‘디자이너‘로 불린다는 것이 아쉽기도 했습니다. 나는 무엇이 강한 사람인지를 이해하고 드러낼 수 있다면 협업의 효율성도 늘어나고 나아가 자신의 강점을 더욱 성장시킬 기회가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저희 팀이 했던 것처럼 스스로와 동료에게 ‘어떤 방식으로 일하는지’ 질문해 보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요? 서로의 강점을 이해하면서 팀이 멋진 시너지를 내는 데 도움이 되리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