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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변화와 거버넌스 체계 혁신

slowalk 2020. 5. 6. 17:33

*빠띠 설립자이자 슬로워크 소셜테크랩 리더 권오현이 2019년 5월 열린 <시민사회 발전을 위한 대토론회>에서 발표한 발제문을 재구성했습니다.

촛불시위에서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의 열망과 함께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지점은 '시민들의 활동 방식'입니다. 촛불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은 저마다 다른 방법과 형식으로 집회에 참여했습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디지털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놀이와 활동을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집회에 참여한 나'를 강조하며 자아정체성 드러내기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촛불시위에서 관찰된 시민들의 활동 방식은 밀레니얼 세대의 등장과 디지털 플랫폼의 확대가 본격화되고 시대와 시민이 변화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모두 한국사회가 수용해야 할 시민 참여의 다양한 모습입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 시민 참여의 형식은 청와대의 국민청원으로만 수렴된 듯합니다. 다수의 국민은 미디어를 신뢰하지 않고 뉴스를 소비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기자나 전문가의 게이트 키핑이나 이슈 메이킹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이슈를 만들 수 있는 창구로 국민청원을 택합니다. 이를 통해 문재인 정부 초기에는 역대 정권에 비해 분명 소통의 질과 양이 확대되었고, 이에 따라 국민들의 효능감 역시 높아졌습니다. 다만 현 정부에서의 시민 참여는 여기서 더 발전하지 못하고 '소통'이라는 키워드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시민들의 열망은 더 큽니다. 10년 전의 참여 정부, 아고라와 비슷한 국민청원에서 그치지 않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그것이 어떤 형태일지에 대한 궁금증도 품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촛불시위를 통해 발현된 더 나은 민주주의 체계를 향한 열망과 기대감 덕분에 조직 내 민주주의, 젠더 갈등, 개별 사건에 대한 이슈 메이킹 활동 등 다양한 사회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제들을 둘러싼 논의는 제한된 참여 형식과 경로 때문에 갈등을 일으키는 데에 그쳤습니다. 이는 조정이나 공론화 과정을 거쳐 정책으로 입법화하지 못해 사회에 부정적으로 작용한다는 비판과 함께 민주주의 가치에 대한 의심으로까지 이어집니다. 

"'혁신적 포용국가'는 양적 성장이 아닌 질적 성장을 추구하며, 배제와 독식이 아니라 공존과 상생의 사회를 도모하고, 미래를 향해 혁신하는 사회이며, 강자만을 위한 대한민국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대한민국을 의미한다"

문재인 정부의 비전입니다. 시민들의 높아진 열망을 뒷받침하고,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정부와 시민사회가 참여의 형식과 경로를 늘려 공존과 상생의 기반으로서의 소통과 협력의 기반을 확대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시민 참여의 변화를 기반으로 새로운 거버넌스 체계를 만들 때 고려해야 할 방향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1. 시민 참여의 포괄적 정의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시민 혹은 시민 단체 활동가와는 다른, 사회 문제나 활동에 무관심한 시민을 의미하는 '일반 시민'이란 이상한 용어가 있습니다. 기획, 실행, 운동 전체 과정에 참여하지 않고 일부에만 관여하는 시민입니다. 일반 시민은 그동안 사회 변화의 주체로서 주목받지 못했지만, 이제는 여론 조사를 통해서도 파악이 되지 않을 정도로 그 수가 많아 사회 변화의 주체로 주목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시민'으로 다시 불려야 합니다. 

기술을 가진 개발자나 디자이너는 시빅해커(Civic Hacker)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정부가 투명하게 공개한 데이터를 활용해 서비스를 직접 만들어 제공합니다. 난임의 고통을 겪는 시민들은 정보를 공유하는 커뮤니티를 만들어 활동하다가, 이것이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발견하고 정부가 저출생 시대의 대책으로서 난임 당사자들을 지원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쓰레기 배출량을 줄이는 활동을 하는 이들은 환경부에 강력한 단속을 요구합니다. 또한 대형 커피숍 프랜차이즈에 일회용품 사용을 줄일 것을 촉구하지요. 보편적, 실질적인 현상을 파악하려면 이들의 활동을 포괄해서 시민 참여를 정의해야 할 것입니다.

각자의 환경에서 할 수 있는 만큼만 활동하는 시민들이 늘고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빠띠

 

2. 종합적이고 협력적인 시민 참여 모델

시민 참여 혹은 시민 주도의 분권 및 자치 모델은 단일하지 않습니다. 작은 조직과 큰 조직의 소통과 협력 방식이 다르고, 조직과 조직, 개인과 조직 간의 소통 방식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법을 만드는 과정에 시민을 참여시키는 경우와 시행 중인 정책에 대한 시민의 의견을 반영하거나 갈등 상황에 놓인 이해당사자를 조정하는 경우도 서로 다릅니다. 적합한 구성 방식을 갖추고 나면 각 단위 간의 조정과 협력 역시 필요합니다. 다양한 민주주의 모델을 개발하고 해당 단위들 사이에도 조정과 협력이 일어나는 환경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지요. 작고 유연한 커뮤니티, 효율적으로 협력하는 조직, 외부 이해관계자들과의 협력, 투명한 정보 공개와 갈등 조정 기능을 포함합니다.

다양한 단위에 적합한 소통과 협력 모델, 이들간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이미지 출처: 빠띠

예를 들어 서울시는 '민주주의 서울'을 통해 시민이 내는 제안, 서울시가 만든 정책을 공론화하는 공론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시민 개인의 제안을 한 명의 공무원이 답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소수의 시민이 제안하고 더 많은 시민이 함께하는 공론화 단계를 거쳐 정책에 반영되도록 하는 모델을 만들 계획입니다. 시 정부의 역할을 고려한 설계입니다.

민주주의 서울은 제안을 공론화하는 과정과 이를 운영하는 체계를 수립하는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미지 출처: 빠띠

 

3. 협력적인 소통에 필요한 기술 기반과 정책

눈부시게 발전하는 디지털 기술 속에서도 유독 제자리걸음을 하는 분야가 있습니다. 바로 미디어와 댓글, 토론 등의 협력적인 소통에 필요한 기술 분야입니다. 투자 수익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차치하고서라도 미디어 서비스는 종이를 디지털화한 데 머물러 있습니다. 토론은 댓글을 남기는 것이 전부입니다. 제한된 도구는 제한된 소통 방식과 여러 부작용을 낳습니다. 

현재 기관들이 주도하는 다양한 시민 참여 플랫폼은 기능 및 운영 노하우 부족이라는 문제 이전에, 기술적인 인프라가 충분치 않다는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온라인에서 안전하게 의견을 낼 수 있나요? 온라인에 표출된 의견을 신뢰할 수 있을까요? 신뢰는 어떤 조건을 내포할까요? 다수가 신뢰하는 데이터가 있나요? 다수가 신뢰하는 대중매체는 있을까요? 의견을 주고받고, 갈등과 조정을 거쳐 합의에 이르는 프로세스는 존재하나요? 대표성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해외 사업자가 운영하는 플랫폼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술이나 정책은 아직 충분히 마련되지 않았고, 지금도 충분히 준비되고 있지 않다고 봅니다. 

페이스북 상에서 불법적으로 정보를 공개한 페이지 운영자와의 대화입니다, 이미지 출처: 빠띠

정부는 부처별로 제각각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서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공공 데이터 확대, 미디어 산업 육성 및 가짜 뉴스 대책 마련, 젠더 폭력 방지 대책, 개인정보보호 대책, 블록체인 기반 투표 시스템 개발 등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긍정적인 흐름이지만, 이를 넘어서 통합적인 논의의 장이 필요합니다. 공존과 상생을 달성하기 위한 포용국가의 인프라로서의 비전을 세우고 소통과 협력에 필요한 기술 개발과 정책 수립을 포괄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공간을 의미합니다. 글과 댓글, 좋아요가 시민 참여를 위해 우리가 구현할 수 있는 기술의 전부는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4. 점진적인 진행 및 혁신적인 수단 

물론 시민 참여의 의미를 확대하고, 사회 곳곳에 필요한 소통과 협력 모델을 개발하며, 이에 필요한 기반 기술과 정책을 마련하는 과정이 단번에 이뤄질 수는 없습니다. 시민 참여 플랫폼 개발 및 운영, 활동하는 시민들에게 인센티브를 주는 정책만이 과정의 전부인 것도 아닙니다. 

직접민주주의 요소와 기존 대의제 및 관료 조직과의 융합, 신뢰할 만한 정보를 정의하는 사회적 합의, 대표성의 정의에 대한 정책 결정 등 시민 참여를 확대하고 권한을 확대하기 위해선 거쳐야 하는 단계가 많습니다. 이들을 실험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실험을 수행하는 동안 여러 가지 안전장치가 있어야만 합니다. 가능하면 갈등과 사회적인 임팩트가 덜한 문제부터 시작해서 심각한 갈등이 있거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단계적으로 적용하는 것도 고려해볼 만합니다.

예를 들어 서울시와 빠띠는 '민주주의 서울'을 시작할 때 결정의 역할보다 시민과의 논의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한편 지금은 서울 시민과 함께 중요한 결정을 하는 데 필요한 기술과 정책도 고민하며 준비하고 있습니다. 시민토론의제선정단과 같은 단위를 만들어서 시민들의 단순 제안이 정책화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기획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주제를 논의할 때에도 시민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따라 들이는 노력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또한 데모스X로 플랫폼 운영 가이드와 소스를 공개해서 외부 전문가들의 피드백을 받기도 하고 시행착오와 노하우도 공유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서울과 같은 기관 주도 공론장 외에도, 빠띠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입법 프로젝트나 공론장 운영 프로젝트, 이슈 커뮤니티 구성 등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한 노하우를 민주주의 툴킷으로 정리해서 오픈소스로 공개했습니다. 

서울시와 빠띠가 오픈소스로 공개한 민주주의 서울 플랫폼 소스와 운영 가이드 데모스X입니다, 이미지 출처: 데모스X 캡처 화면
빠띠의 시민입법, 시민토론 등의 민주주의 툴킷입니다, 이미지 출처: 빠띠 홈페이지 캡처 화면

산업을 육성할 때 활용하는 혁신적인 수단도 모색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리콘밸리 최고의 벤처 캐피털인 와이콤비네이터는 2017년에 민주주의, 언론, 일자리 문제를 다루는 스타트업에 투자하겠다고 공표했습니다. 유럽위원회는 2012년부터 The CAPS initiative (Collective Awareness Platforms for Sustainability and Social Innovation)를 운영하며 지속가능성과 사회혁신을 위한 달라진 시민 참여 기반의 솔루션을 만들기 위한 연구 작업, 펀딩, 플랫폼 개발을 지금까지 진행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정부의 시민 참여 플랫폼 연구를 중요한 과제로 다루어야 합니다. 시민 참여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사회적 기업이나 플랫폼 협동조합이 늘어나면 더더욱 바람직하겠고요. 

CAPS의 활동 영역입니다, 이미지 출처: CAPS

 

결론

디지털 기술이 변화하는 속도만큼, 시민도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이 속도가 늦춰질 것 같진 않습니다. 그렇다면 뒤쫓을 게 아니라 변화의 흐름에 동참하고 그 변화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어지도록 함께 기여해야겠지요.

디지털에 기반한 정보 기술은 정보를 축적 및 확산할 수 있고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설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이를 활용해 완전히 새로운 거버넌스 모델을 수립할 수 있는 시점에 도달했습니다. 특히 한국 사회의 경우, 산업화, 민주화를 거쳐 촛불시위에 이르기까지 반세기 동안 이뤄낸 성과를 돌이켜보면 포용적이고 협력적인 거버넌스 체계 수립을 앞서 실현할 수 있는 사회 경험과 기술 기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압축 성장을 거쳐 서로 다른 경험을 한 다양한 세대가 동시대에 사는 복잡한 사회이기도 합니다. 분단국가이기도 하지요. 따라서 갈등을 조정하고 상생과 협력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은 시급한 과제이기도 합니다. 혁신적인 민주주의와 거버넌스 체계 수립이 과제이면서도 기회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다음 5개의 거버넌스 체계 요소가 잘 기능하는 사회를 바라봅니다.

1) 사회가 공통으로 신뢰하는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고, - 정보공개
2) 누구나 각자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 이슈를 가지고 각자의 여건만큼 활동하며, - 커뮤니티
3) 중요한 시기에 중요한 이슈에 모두가 함께 참여하도록 독려하고, - 캠페인
4) 참여한 시민들이 서로 신뢰하는 방식을 활용해 공론을 만들고, - 매스 미디어, 공론장, 소통과 신뢰 기술
5) 공론이 기관의 정책 수립, 법 개정, 예산 조정에 영향을 끼치는 사회 - 기관 주도 공론장

이제는 이런 사회를 위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만들지 구체적으로 결정해야 합니다.



글 | 빠띠 설립자, 슬로워크 소셜테크랩 리더 시스
이미지 | 슬로워크 책임 디자이너 길우
편집 | 슬로워크 책임 테크니컬 라이터 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