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am Slowalk

"관용은 없습니다 여러분"

slowalk 2021. 3. 5. 16:36

슬로워크 성폭력 사건 처리 가이드 제작기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International Women’s Day)은 여성의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성과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젠더 평등을 위한 행동을 촉구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세계여성의날 #internationalwomensday #IWD2021


 

2017년, 슬로워크는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조직 내 여성 인권과 관련해 다양한 조치를 취할 것을 블로그에 공개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조직 내 성폭력 고충 해결 프로세스를 수립'하는 것이었어요. 이후 2019년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해 꼭 1년의 시간을 들여 14페이지 분량(A4 기준)의 '슬로워크 성폭력 사건 처리 가이드'를 완성했습니다.  

 

이 가이드에서 우리는 슬로워크는 성폭력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상황이 발생했을 때 당사자와 주변인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절차는 어떤 경우가 있는지 상세하게 기술했어요. 사건이 발생하면 즉각적으로 대처해야 하고, 그보다는 상황 자체가 발생하지 않기 위해 구성원 모두가 반드시 유념해야 하는 내용을 담았어요. 기획과 작성, 편집에 당시 여성자유보장위원회 Pitch(이하 Pitch) 위원 오수희, 쏠(김한솔), HQ(사업운영본부)의 누들(성노들), 펭도(조성도)의 많은 수고와 노력이 담겼습니다.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기쁜 마음으로 좌충우돌했던 그 과정을 되짚어보려 합니다.

 

 

가이드 제작의 서막

2019년 1월, Pitch는 당시 CPO이자 HQ 리더였던 펭도와 함께 '고충처리규정'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었어요. 조직 내 고충의 종류를 1) 노동환경 및 노동조건에 대해 부당한 점, 2) 사내외 업무 관련자로부터 받은 성희롱 및 성폭력, 3) 그 밖에 업무와 관련하여 어렵거나 힘든 점으로 구분했고, Pitch와는 성차별 및 성폭력 고충에 대한 매뉴얼을 슬로워크에 맞춰 작성하는 작업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습니다.

 

첫 시작으로 여성가족부에서 배포한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 사건 처리 매뉴얼'의 내용을 우리 상황에 맞게 변경하는 워크숍을 열기로 했어요. 이를 위해 작업에 참여한 4명이 각자 분량을 나눠 읽고 맡은 부분의 변경사항을 고민해 먼저 논의를 열었습니다. 사건 처리 과정에 필요한 인원은 몇 명으로 할 것인지, 어떤 사람이 적당한지, 징계 규정과 징계 위원회는 어떻게 구성할지 등등 세부적으로 논의해야 할 이슈가 정말 많았습니다. 내부에 전문가가 없으니 당연히 막막했고 저는 이때 직감했죠. 쉽지 않겠구나. 

 

이럴 때 최고의 방법은 역시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전문가에게 직행하는 것입니다. 2017년 슬로워크 성희롱 예방교육을 진행해주신 인연이 있던 서울시성평등활동지원센터장 로리주희님에게 자문을 요청했어요. 규정 수립 시 참고할 점, 사건 처리 프로세스, 단계별 인력 구성, 자문위원 위촉 및 운영 방식, 전문가 추천으로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눠 의견을 들었습니다. 전체 내용을 모두 기록할 수는 없지만, 자문해주신 내용을 거의 모두 반영했을 만큼 꼼꼼하고 명확한 자문이었어요. 

 

 

본격적인 제작의 시작

3월이 되어서야 자문 내용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가이드 제작에 돌입합니다. 앞선 워크숍 개최, 공공기관에 적합한 기존의 매뉴얼 형태에서 벗어나 민간의 자료를 참고해서 핵심만 담은 가이드를 새로 만들어보기로 했어요. 그전에 용어 정리부터 필요했습니다. 기존에는 규정, 매뉴얼, 지침 등을 혼용해서 사용했는데요. 슬로워크는 규정과 가이드 두 가지로 구분해서 안내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건 처리 규정은 가이드로 변경하고 징계를 위한 규정은 인사 규정으로 따로 추가하는 것으로 정리했습니다.

 

작업을 담당한 4명의 본격적인 첫 업무 구분은 이렇게 했습니다. 펭도는 민간의 레퍼런스를 모아서 업로드하고, 수희는 스케줄 관리와 재촉의 역할, 누들은 모여서 할 일을 정리하고 전체 문서 개요를 짜고, 쏠은 보기 쉽게 플로우차트를 만들어 보기로 했어요. 처음 회의는 아주 희망차게도 3개월 이내에 작업을 완료해서 6월에 사내 공지를 하는 것이 목표였어요. 분량도 2페이지를 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고요. 하지만 언제나 예상은 빗나가기 마련이죠.

 

먼저 목차는 이렇게 구성했습니다. 오픈페미니즘에서 만든 국민대학교 조형대 웰컴키트 중 '성폭력 대처 매뉴얼'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어요. 인용된 부분은 출처를 표기하고 내부에서 사용해도 괜찮다는 허락을 구했습니다.

 

1. 연대와 당부의 말

2. 슬로워크는 성폭력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3. 상황 발생 직후 대처 방법

4. 슬로워크 내부 사건 처리 절차와 방법 (단계별 담당자, 절차 안내)

5. 관계 당사자의 권리

6.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관 리스트

 

그리고 목차별로 내용을 채워 넣을 사람들을 정했죠. 가장 잘할 수 있고 잘 어울리는 것을 맡았어요.  저는 오렌지레터 인트로를 쓰던 짬(?)으로 연대와 당부의 말을 담당했습니다. 단어 하나하나 고르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했고, 또 이 글이 선언이자 경고인 동시에 지지의 메시지를 담아야 했기 때문에 무척 어려웠던 일이었어요.

 

 

본문의 내용은 국민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 학생회 반성폭력학생회칙,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심리치료적 접근> 채규만/성신여자대학교 심리학과, <성폭력 대처방안> 이명화/서울시 아하! 청소년성문화센터,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의전화, 한국성폭력위기센터 등에 오픈된 자료를 이용해 채웠습니다.

 

단계별 절차에 따라 담당자를 정하는 것도 중요한 지점이었습니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접수를 담당할 사내 구성원은 신뢰할 수 있으면서 젠더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이라야 했어요. 접수 과정에서 2차 가해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인사 담당자로 구성된다는 자문 내용에 따라 HQ 내부의 여성1인, 남성1인으로 구성했습니다. 이후 상담과 조사, 고충심의 등에는 전문 역량이 있는 외부 전문가를 자문위원 풀로 구성해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의뢰하기로 했어요.

 

이렇게 작성된 내용을 4인이 함께 검토하고 단어 하나도 오해가 없도록 많은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었어요. 기존 성희롱/성폭력을 구분하던 것을 '성폭력'이라는 단일한 표현으로 바꾸었는데, 이는 "상대의 동의를 받지 않은 성적 언동을 하거나 요구함으로써 한 인간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직간접적으로 침해하고 인간의 존엄을 해치는 행위" 모두를 경중에 상관없이 성폭력으로 규정하는 합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이드의 모든 내용을 옮길 수는 없지만, 2페이지로 예상했던 문서의 길이가 14페이지로 길어진 이유도 비슷했어요. 가능한 구성원 모두가 같은 수준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을 상세히 덧붙이고 싶었습니다.

 

(사내 커뮤니케이션 채널인 슬랙으로 슬로워크 성폭력 사건 처리 가이드를 전체 공지했습니다)

 

그렇게 완성된 가이드는 오수희와 누들이 2차에 걸쳐 최종 윤문을 보고, 본격적인 제작 1년 만에 사내 전체공지를 할 수 있었습니다. 7번의 공식적인 회의와 오며 가며 나누던 셀 수 없는 대화와 논의의 결실이었습니다. 작업에 참여한 모두가 기획자, 디자이너, 라이터 등의 본업이 있었기 때문에 예상보다 긴 시간이 걸렸지만, 이 작업을 결국 완료해냈다는 데 가장 큰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회사가 모든 구성원을 향해 성폭력에 "관용은 없다"는 무관용 원칙을 천명한 것, 그리고 피해자의 보호와 일상의 회복을 위해서만 전념할 것을 공식 문서로 만들어 배포했다는 것이 여성 구성원으로서 큰 힘이 되었어요.

 

(성폭력 사건 처리 가이드 요약본)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일

가이드를 제작하고 배포했다고 모든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실제 사건이 발생했을 때를 가정해봤어요. 성폭력을 당한 사람이 14페이지나 되는 가이드를 모두 읽고 그에 따라 행동할만한 여력이 있을까? 저라고 생각해보니 그럴 수 없을 것 같더라고요. 1페이지로 요약이 필요했습니다. 이왕이면 인쇄해서 곁에 두고 사건이 발생하면 바로 확인할 수 있도록 해야겠더라고요. 요약 버전은 사건 처리 가이드를 제작한 누들과 같은 팀 디자이너 길우가 참여했습니다. 

 

무관용 원칙의 적용을 가장 첫머리에, 피해자가 '이것이 성폭력인가'에 대한 혼란을 줄일 수 있도록 성폭력의 정의를 그다음에, 발생 시 바로 해야 할 행동을 순서대로 이어서 정리했습니다. 보통 이런 가이드를 만들 때 슬로워크의 키 컬러인 오렌지색을 주로 활용하는데요. 발랄하고 경쾌한 느낌이 있어 성폭력 사건에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어요. 그래서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보조 컬러인 슬로워크 웜그레이 색상 팔레트를 적용해 따뜻한 느낌이 들게 작업했습니다.

 

 

이번 가이드를 만들면서 정말 많은 분의 도움과 연대의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슬로워크 성폭력 사건처리 자문위원으로 참여해주신 5명의 전문가, 훌륭한 자료를 만들고 외부에 공개해주신 수많은 성평등 단체에서 특히 큰 영감을 받았습니다. 쉽지 않은 작업을 먼저 제안하고 주도해주신 멋진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에 또 큰 발걸음 하나를 내디뎠습니다. 슬로워크도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았는데요. 매년 돌아오는 여성의 날을 기쁜 마음으로 기념할 수 있도록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바꿔나가려고 합니다. 슬로워크 성폭력 사건 처리 가이드 가장 첫 장에 적어둔 연대와 당부의 말을 끝으로 긴 글을 마칩니다.


슬로워커 여러분, 안녕하세요.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슬로워크는 "창의적이고 영감을 주는 솔루션을 통해 조직과 사회의 변화에 기여하고, 이러한 변화를 지향하는 사람들의 네트워크를 확대하는 것"이라는 미션을 갖고 함께 움직이는 가치 중심의 조직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와 해내야 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마냥 어렵기만 한 일도 아닙니다. 좋은 동료, 좋은 이해관계자와 함께한다면 어렵지만 할만하기도 한 것이죠. 우리는 그것을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것은 때로 너무 추상적이어서 똑같은 상황과 행동, 말일지라도 사람에 따라 이해하는 정도와 폭이 무척 달라지기도 합니다. 특히 나와 같은 길을 함께 가고 있다고 믿었던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실망, 당혹감, 원망, 죄책감과 같은 온갖 복잡한 감정이 더 크게 밀려옵니다. 그리고 그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있는 동안 우리는 감정을 억누르고, 판단을 유보하고, 어쩌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채 꾸역꾸역 일상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럴 때 옆에서 길을 터주고 도움에 기꺼이 응하며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큰 힘이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연대'라고 부릅니다. 연대에는 수많은 방법이 있겠죠. 모른다고 외면하지 않고 알려고 노력하는 것, 대신 나서 주는 것, 편을 들어주는 것, 말을 함부로 옮기지 않는 것, 온 마음으로 응원하는 것, 조심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행동하는 것. 그러나 연대의 정신만큼 중요한 것은 바로 구체적인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제도와 규칙, 이를 수행할 수 있는 탁월한 전문가와 같은 기반을 갖추고, 회사는 적재적소에 필요한 사람을 배치하고 지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가이드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회사는 피해자의 보호를 위해서만 오직 최선을 다해야 하고, 가해 사실이 확인된 구성원 혹은 이해관계자에게 절대 관용을 베풀지 않을 것을 이 문서를 통해 약속합니다. 여러분이 혹시라도 어려움이 생겼을 때 안심하고 도움을 청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회사로서,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나 했습니다. 이게 끝이 아니라 바로 여기부터 시작입니다. 여러분의 회사 생활에 이 가이드를 활용해야 할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그래야만 할 일이 있더라도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도록 힘이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모두의 일상을 응원합니다!

 

 

 


글 | 브랜드 라이터 누들

이미지 | 책임 디자이너 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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