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워크 아이덴티티 수립 프로젝트는 크게 세 단계의 프로세스로 진행되었습니다. 과거를 돌아보는 Until Now가 1단계, 슬로워크를 둘러싼 내·외부 상황을 진단하는 Right Now는 2단계, 그리고 미래의 아이덴티티를 수립하는 From Now on이 3단계인데요. 오늘은 Right Now 단계의 마지막 글입니다. 오늘 글의 제목은 좀 뜬금없습니다. '지금이 던킷도넛 먹을 때인가요?' 무슨 영문인지 궁금하시다면 천천히 한 번 읽어보세요. 읽다 보면 정황이 드러납니다.
② Until Now: 슬로워크 10년, 용하게 살아남았습니다.
③ Right Now 1: 이러다 우리 망하는 거 아냐?
④ Right Now 2: 슬로워크 진단 결과는 '보통 회사'
⑥ Right Now 4: 지금이 던킨도넛 먹을 때인가요?
⑦ From Now on 1: 아이덴티티 수립 과정, 이렇습니다.
⑧ From Now on 2: 슬로워크 아이덴티티를 공개합니다.
앞의 연재 글들에서 보듯이 Right Now 단계에서는 1) 외부환경을 거시적인 변화와 비즈니스 단위의 변화로 분석하고, 2) 내부 조직을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 진단해보았으며, 3) 내·외부의 모든 이해관계자로부터 설문을 통해 의견을 받고, 4) 국내·외의 다양한 배울 점 많은 회사를 조사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두 달에 걸쳐 이렇게 여러 가지 조사들을 다 하고 나니 상당량의 정보와 분석점들이 나왔습니다.
ITF(아이덴티티 태스크포스)에서 다음으로 준비한 일이 이 다양하고 방대한 정보들을 토대로 논의할 수 있는 워크숍과 라운드테이블이었는데요. 이런 논의의 장을 마련한 데에는 아래와 같은 동인이 있습니다.
1) 조직을 둘러싼 다양한 리서치 결과를 모든 구성원에게 공유하기 위해
슬로워크는 현황 파악에 해당하는 모든 작업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정리된 현황을 구성원 모두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파악된 결과가 구성원에게 잘 공유되지 못하면, 구성원들이 프로젝트의 흐름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게 되고, 나중에는 관심 자체가 떨어지게 되죠. 사실 슬로워크도 이번 프로젝트 과정마다 파악된 정보들이 잘 공유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더욱 Right Now 단계의 리서치 결과들을 모든 구성원이 심도 있게 공유하고 논의하는 기회가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2) 이해관계자 참여(Stakeholder Engagement)를 통해 더 넓은 시야를 얻기 위해
전방위적인 리서치를 통해 회사 안팎의 현황을 파악하고 정리하는 일은 ITF와 IC(아이덴티티 위원회)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리서치 결과들을 모두 통합하고 이를 토대로 시사점과 아이디어를 논의하는 작업은 좀 다르다고 판단했습니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처럼, 조직 내부에서 꾸려진 하나의 팀만으로 우리 자신을 충분히 바라볼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과로부터 적용 점을 뽑아내는 작업과 미래를 바라보며 아이디어를 도출하는 과정은 이해관계자들의 다양한 시각이 더해질수록 풍요로워질 거라는 확신도 있었고요. 그래서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이해관계자 참여를 실행하고자 했습니다.
3) 아이덴티티 수립 작업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는 토대 마련을 위해
아이덴티티 수립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사전 준비의 의미도 있었습니다. 리서치 결과가 아이덴티티 수립 작업의 재료로 잘 활용되도록 워크숍과 라운드테이블이 중요한 연결고리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이런 목적성을 가지고, 9월 4일에는 모든 구성원이 참여한 '구사일생 워크숍'을, 9월 15일에는 외부 이해관계자들을 초청해서 진행한 '슬로라운드'를 진행했습니다.
구사일생 워크숍: 날짜도, 다루었던 내용도 모두 '구사일생'
Right Now의 리서치를 마치고 슬로워크가 직면한 현황을 살펴보니 크게 두 가지가 보였습니다. 외부적으로는 슬로워크 10년 동안 강산이 변해도 무지막지하게 변했고, 내부적으로는 회사가 성장해오면서 조직 측면의 문제들이 누적됐던 것이죠. 두 가지를 합쳐보니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내우외환. 그리고는 백척간두, 누란지위, 여리박빙, 초미지급, 진퇴양난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상당히 앞이 까마득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워크숍의 목표가 '구사일생'이 되었습니다. '아홉 번 죽을 뻔하다 한 번 살아난다.' 즉, 워크숍을 통해 서로가 느끼는 현재 상황에 대해 나누고 우리의 장래를 밝게 이끌 수 있는 아이디어를 모두가 함께 고민해보자는 것이죠. 이런 취지를 가지고 구사일생 워크숍은 9월 4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진행되었습니다.
하루라는 시간이 많다면 많지만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논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기 때문에, 더 효과적인 워크숍을 위해 모두가 유념해야 하는 간단한 원칙이 있었는데요.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그리고 워크숍 일정은 논리적 연관성을 지닌 다섯 개의 주제를 세 개의 세션으로 나누어 차례대로 진행했습니다. 세션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모두가 워크숍 원칙과 주제를 잘 지켜가면서 온종일 열띤 토론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워크숍을 위해 만들어진 팀마다 각 주제에 대해 의견을 정리하고 서로 의견을 발표했습니다. 각 테이블에서 제시된 의견들은 수백 가지가 넘고, 이 중 발표된 의견들만 해도 한 질문에 대해 팀당 5개씩이었으니 모두 합쳐 100개였는데요. 이 중 눈에 띄는 의견이 바로 워크숍 간식이었던 던킨도넛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PC 성능이나 용량이 부족한데 워크숍에서 던킨도넛 먹고 있는 모습을 보면 뭐가 먼저인지 혼란스럽다. 당장 일하기 힘든 것을 고쳐야 하는 것 아닌가."
이 의견을 보고 다들 웃음이 나왔지만, 사실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습니다. 이 외에도 가볍지만 정곡을 찌르는 내용부터 무겁고 심각한 내용까지 다양한 의견들이 모였고, 마지막에는 발표된 의견들 중 어떤 내용에 더 공감하는지 모두가 투표하는 시간을 가지며 워크숍을 마무리했습니다.
워크숍의 결과는 ITF에서 다시 정리하여 한 번 더 내부에 공유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섹션 별로 워크숍에서 가장 많은 표를 받는 의견들을 간단하게 소개하며 구사일생 워크숍 소개를 마칩니다.
이슈1. 향후 10년 이내에 슬로워크가 망한다면 그 이유는.
1) 슬로워크만의 탁월한 방법론과 프로세스가 부족해서
2) 부서별 업무와 이익 구분으로 인해 내부 경쟁이 심해져서
3) 부가가치가 낮은 일들만 지속하다가
4) 도전을 두려워하고 다양한 시도를 하지 않아서(시장에서 도태되어서)
5) 장기적이고 규모가 큰 프로젝트를 진행하지 못해서
이슈2. 10년 후 적어도 망하지 않으려면.
1)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일을 시도한다
2) 높은 퀄리티를 위해 최소한의 프로젝트 기간과 예산을 보장한다
3)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프로세스를 개선한다
4) 사람을 뽑을 때 신중하고 엄격하게 채용한다
5) 합리적인 성과 측정과 보상이 이루어지도록 한다
이슈3. 10년 후 슬로워크가 사업적으로 성공하려면.
1) 디자인 서비스 영역을 성공적으로 확장한다
2) 구성원 개개인의 자기역량을 강화한다
3) 자체 콘텐츠 생산 능력을 강화한다
4) 부가가치가 높고 동기부여가 되는 프로젝트를 개발한다
이슈4. 일하기 좋고 가치 있는 회사가 되려면
1) 야근 없는 삶
2) 지금보다 더 높은 수준의 복지 제도
3) 업무 환경의 우선 개선
4) 부정적인 의견도 당당하게 공개하고, '제대로' 들어주자
새로운 시도, 슬로라운드(slo-round)
'슬로라운드'는 slowalk roundtable의 줄임말입니다. 슬로워크가 고민하는 주제에 대해 외부 이해관계자와 전문가를 초청하여 의견을 듣고 실행하는 원탁토의 방식 대화의 장인데요, 이번 아이덴티티 수립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처음 시도해 보았습니다.
ITF에서는 슬로라운드를 기획하면서 두 가지를 고민했습니다. 첫 번째는, 슬로라운드의 주제입니다. 현재까지의 리서치 결과를 아우르면서도 고민하는 미래의 방향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려면 어떤 주제가 좋을지 논의한 끝에 아래와 같은 대화 주제를 선정했습니다.
Round 1. 슬로워크 현황 진단: 슬로워크, 이대로 괜찮은가?
Round 2. 크리에이티브 산업의 미래 구상: 슬로워크,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나?
두 번째는, 슬로라운드의 패널입니다. 선정된 주제에 대해 좋은 의견을 들려줄 수 있는 이해관계자와 전문가를 모시는 것도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효과적인 대화를 위해 우선 패널 인원을 최대 5명으로 제한했습니다. 그리고 슬로워크의 고객, 같은 업계의 전문가, 슬로라운드 주제에 대해 깊이 있는 토론이 가능한 전문가들을 패널로 섭외했습니다. 다행히 초청한 전문가 대다수가 패널 참석을 승낙하여 슬로라운드 진행에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슬로라운드의 전체적인 진행은 사전에 계획한 아래의 절차를 따랐습니다.
- 패널 참석자들은 주제에 집중하고 자유롭게 토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슬로라운드 진행 장소의 중앙에 마련된 테이블에 사회자와 함께 둘러앉습니다.
- 슬로워커들은 패널의 의견을 실시간으로 경청하고 대화할 수 있도록 패널 테이블 바깥쪽에 모두 둘러앉습니다.
- 먼저 패널들이 슬로워크의 현재 모습과 회사를 둘러싼 경영환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ITF에서 아이덴티티 수립 프로젝트의 진행 경과와 리서치 결과를 발표합니다.
- 발표 후, 라운드 1과 라운드 2로 슬로라운드 토의를 진행합니다. 사회자는 대화가 라운드마다 잘 진행되도록 대화의 흐름을 살피되, 패널들이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자연스럽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도록 최대한 개입하지 않습니다.
- 라운드 1과 라운드 2가 끝나면 구성원들이 직접 패널에게 질문하거나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시간으로 이어서 진행합니다.
아무래도 패널과 구성원 모두 이런 방식이 처음이다 보니 계획대로 진행은 되었지만, 분위기가 무르익는 데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라운드 2에서부터는 사회자가 굳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모든 패널 참석자가 예리한 분석과 좋은 의견을 주셨습니다.
▲ 슬로라운드 상황: 이름은 라운드테이블인데 진행은 네모난 테이블에서 진행함.
▲ 슬로라운드 패널.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염재승 대표(텀블벅), 김창준 대표(애자일 컨설팅), 최혜정 캠페인디렉터(세이브더칠드런), 최소현 대표(퍼셉션).
사진에서 진지한 토론 분위기가 느껴지시나요? 논의의 발동이 늦게 걸린 터라 3시간이 너무 금방 가버린 느낌이었습니다. 마지막에는 시간도 부족했고요. 하지만 전반적으로 슬로라운드 현장의 분위기는 좋았습니다. 슬로라운드 결과를 정리하면서도 짧은 시간에 좋은 이야기들이 많이 오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패널들의 고견을 모두 공유할 수는 없지만, 꼭 나누고 싶은 몇 가지 메시지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문제의 해결을 위해 분석과 조사를 통한 진단도 필요하지만, 결국 우리가 어떤 열정과 목표의식을 가지고 일할 것인가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리더들이 좋은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면 오히려 괴리감을 부추길 수 있다. 좋은 회사가 될 수는 있지만 모든 직원에게 항상 행복을 줄 수는 없고 회사로서의 한계가 존재한다. 채용 단계부터 이런 부분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잘 나간다는 회사들은 강하게 이끌어주는 리더들이 있다. 슬로워크의 리더들은 자신의 신념과 비전을 구성원에게 얼마나 강력하게 이야기하는지, 다독여야 할 때와 강하게 이끌어가야 할 때는 구분하고 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회사의 가치가 막연할수록 혼란이 심해진다."
"서비스를 주도적으로 운영하지 못하는 컨설팅이나 에이전시는 변수가 너무 많아서 역할과 책임(R&R)이 명료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일에 대해 '내가 할게요'라고 말할 수 있는 자기 주도적인 조직이 이상적이다."
"언어의 통일이 중요하다. 서로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언어로 이야기하도록 해야 한다."
"프로젝트는 한 번에 끝나는 싸움이 아니므로, 프로젝트 하나하나의 결과보다는 학습을 우선시해야 한다. 슬로워크도 프로젝트를 할 때 학습의 측면을 고려하면 좋을 것이다. 학습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하거나 아니면 프로젝트를 학습할 수 있는 형태로 바꾸는 두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업무에서 불확실성이 높은 상황을 극복하려면 작업자가 '이것을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해 질문할 수 있어야 하고, 관리자는 '왜 해야 하는지'를 더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마무리: 구사일생 워크숍과 슬로라운드 소감
앞서 진행했던 외부환경 분석, 조직 진단, 이해관계자 설문, 벤치마킹 조사를 진행하면서는 여기저기 숨어 있는 정보와 시사점들을 수집하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반면, 구사일생 워크숍과 슬로라운드에서는 앞선 모든 리서치 결과를 검토하고, 재해석하고, 중요성을 가늠하면서 리서치 결과가 정제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 가지 깨달은 점도 있습니다. 프로젝트 조직을 넘어 모든 구성원 그리고 외부의 이해관계자들까지 한 자리에서 열띤 논의를 펼치는 것을 보며 리서치를 많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결과를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도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점을 느꼈습니다.
결론적으로, 구사일생 워크숍과 슬로라운드는 Right Now 단계의 리서치 결과와 From Now on 단계의 아이덴티티 수립을 연결해주는 중요한 가교 구실을 해주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 글부터는 본격적인 아이덴티티 수립에 대해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아이덴티티 공개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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