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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nd&Design

갑을 관계를 넘어 공생의 관계로, 디자인 표준 계약서 소개


이미지 출처: Richard Busch, CC BY-NC-SA 2.0


순서나 우열을 나타낼때, 첫째와 둘째를 이르는 말이 있습니다. 많이 들어보셨을 텐데요, "갑을"이 바로 그것입니다. 본래 갑을은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이하 '십간')에서 나온 말로 하루하루를 표현하는 방식이라고 합니다. 즉 십간의 10일을 1순으로 하여 한달을 3순으로 나누었으며 매번 중복되는 달수를 피해 12지간을 붙여 사용하는 것이죠. 이것이 많이 들어보신 '60갑자' 입니다.

 

이 "갑을"의 의미가 최근에는 조금 다르게 사용되는것 같습니다. 첫째와 둘째, 하루하루. 이런 의미는 시간의 변화와 흐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지금 "갑을"의 의미는 상하관계나 주종관계를 의미하는것 같습니다. 흔히 '갑질한다'나 '을의비애'처럼 갑에는 힘이 들어가 있고 을에는 인내하고 참아야만 하는 느낌이 듭니다. 무엇이 갑을의 의미를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갑을'이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쓰이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계약서>이지요. 서로의 필요한 부분을 보충해 상호간 믿음을 바탕으로 결과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는 약속의 문서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사용되었던 계약서 내용에는 그것의 본래 의미를 퇴색케 하는 많은 내용들이 있습니다. 불공정조항. 바로 그런 내용들 때문에 갑을의 의미가 다르게 해석되는게 아닐까요.




한국디자인진흥원발간(2010), 디자인권리보호가이드북



 

지난 2010년 한국디자인진흥원에서는 디자인 계약의 큰 문제점 4가지와 그 개선안을 제시하며 디자인 용역 표준계약서를 공개하였습니다. 4가지 문제점은 각각 다음과 같습니다. 낮은 디자인 단가, 과업 범위의 불명확, 지적재산권의 귀속, 그리고 무한 책임전가. 그중 지식재산권의 귀속과 무한 책임전가 부분이 현재 어떤 불공정한 모습으로 나타나 있는지, 그리고 그 개선안은 어떻게 되었는지 보여드립니다.

 

#1. 지식재산권 소유문제

 

(예시) '을'이 보유하고 있는 저작권 등을 포함한 지식재산권 이외의 본 도급을 통하여 얻어진 모든 지식재산권(2차적 저작물 포함)은 "갑"에게 있으며 "을"은 본 계약 체결 이전에 자신이 소유하거나 권리를 보유한 지식재산권에 대하여 본 계약상 목적 범위 내에서 "갑"에게 무상의 실시권을 허용하여야 한다.

 

(개선안) "을"이 보유하고 있는 저작권 등을 포함한 지식재산권을 사용할 때는 "을"과 협의하여 승인을 얻은 후에 사용하고 "갑"은 "을"에게 대가를 지불할 수 있고, 본 도급 계약을 통하여 얻어진 모든 지식재산권(2차적 저작물 포함)은 "갑"과 "을"이 협의하여 지식재산권별로 권리자를 지정하고 "을"은 본 계약 체결 이전에 "을"이 소유하거나 권리를 보유한 지식재산권에 대하여 본 계약상 목적범위 내에서 "갑"과 협의하여 유상, 무상의 실시권을 구분하여 승인하고 공급하기로 한다.

 

개선안의 내용이 조금 복잡하지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예시의 조항은 현재의 업무 관계를 이용해 을이 보유하고 있는 지식재산권을 무상으로 사용하겠다는 내용입니다. 만약 현재의 업무와 관련해 필요한 지식재산권이라면 그에 준하는 대가를 지불하고 사용해야 한다는 것으로 개선안을 내놓았습니다.


*지식재산권: 소유권,특허권, 실용신안권, 디자인권, 상표권, 저작권, 초상권 등 제 권리의 본래적 일체를 포함.

 

#2. 무한 책임 전가 문제

 

(예시) 디자인 용역 결과물의 인도전에 발생한 손해는 특별히 정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을"의 부담으로 한다. 제3자에게 손해를 끼친 경우에도 같다.

 

(개선안) ① 디자인 용역 결과물을 "갑"에게 인도하기 전에 발생한 손해에 대해서는 "을"의 귀책 사유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을"의 비용으로 부담하고, "갑"과 "을"의 책임소재가 불명확할 경우에는 "갑"과 "을"이 협의하여 합의한 비율대로 비용을 공동 부담한다.

② 제3자에게 손해를 끼친 경우에도 제 ①항의 규정을 적용한다.

 

계약은 신실성의 원칙에 입각합니다. 즉, 상호간의 권리와 의무가 평등하게 부담되어야 함이 원칙입니다. 책임 소재가 분명한 경우에는 그에 맞는 책임을 지어야 함이 마땅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상호 협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개선안입니다.

 

위 2가지 사례의 개선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좀더 합리적으로 보이시나요? 당시에는 이런 "을"을 위한 계약처럼 보이는 내용에 대해 상당히 파격적이다 라는 의견이 많았었는데요, 아마도 불과 몇년전까지도 "을"은 약자일수 밖에 없는 현실이 반영되어 그런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개선안의 내용이 담긴 표준계약서 발표 이후, 지속적인 연구와 관련부처 협업을 통해 발전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었다는 것이죠. 



산업통상자원부 고시(2013), 디자인 용역계약 표준계약서

 

그리고 2013년 6월, 좀더 발전된 형태의 디자인 표준계약서가 산업통상자원부 고시로 발표됩니다. 이 표준계약서는 제품, 시각, 멀티미디어등 3개 분야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요, 특히 그동안 불명확했던 발주처와 공급자간의 권리와 의무 관계를 좀더 구체화 했습니다. 앞서 살펴본 2가지 부분에 개선안이 이곳에는 이렇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1. 지식재산권 소유문제

 

...(중략) 본 용역 수행과정 중에 수요자에게 제시된 공급자의 중간인도물, 사전작업물, 최종인도물의 개별구성요소에 대한 지식재산권은 공급자에게 귀속되며, 공급자의 허락 없이 사용할 수 없다.

 

#2. 무한 책임 전가 문제

① 공급자는 최종인도물에 제3자의 지식재산권을 의도적으로 침해하지 않을 것을 보증한다.

② 공급자는 제3자의 지식재산권을 침해함으로 인한 수요자의 손해에 대하여 책임을 부담한다. 다만, 공금자의 책임 없는 사유로 인하여 발생한 경우에는 수요자가 부담 한다.

...(중략)

 

고시 발표된 디자인 표준 계약서에는 이외에도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계약을 변경, 해지한 경우의 손해 배상을 규정했다는 점, 최종 인도물에 대한 검수·승인절차를 규정했다는 점, 용역단계별로 발생하는 창작물의 지적재산권 귀속 주체를 명시했다는 점 등이 기존의 디자인 용역계약서와 다른 점입니다. 또 갑과 을이라는 명칭 대신 ‘수요자’와 ‘공급자’라는 명칭을 사용해 평등한 관계를 유도한다는 점도 눈에 띄네요. 참고로 슬로워크에서는 갑과 을이라는 명칭 대신 '수요자'와 '창작자'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혹시 회사내에 볼수 있는 계약서가 있다면 한번 표준계약서의 내용과 어떤점이 다른지 살펴 보는것도 재미있을것 같습니다. 사전에 표준계약에 대한 내용을 알고 있다면 좀더 당당하게 을의 권리를 요구할수 있지 않을까요. 계약서 자체가 일의 본질은 아니지만 그 내용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본질에 가까워야 합니다. 서로간 최선의 노력으로 최고의 결과를 내는것, 그렇게 하기위한 우리 요구는 당당한 "창작자"의 권리입니다.

 

 

출처 : 한국디자인진흥원 디자인권리보호가이드북(2010), 산업통상자원부 디자인 용역계약 표준계약서 고시(2013)



by 누렁이 발자국